특수교육 현장에서 아이들과 원예 수업을 하다 보면, 한 아이가 혼자 흙만 만지고 있고 옆 친구는 꽃 이름만 중얼거리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부모님들은 "우리 아이가 친구를 못 사귀면 어쩌죠"라며 걱정하시는데, 사실 저도 처음엔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PEERS(Program for the Education and Enrichment of Relational Skills) 프로그램을 접하고 나서, 사회성이라는 게 타고나는 '감각'이 아니라 배워서 익힐 수 있는 '기술'이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자폐스펙트럼 장애 아동에게 필요한 건 추상적인 격려가 아니라 구체적인 절차와 반복 가능한 훈련이었습니다.
PEERS 프로그램이란 무엇이며 왜 효과적인가

PEERS는 부모와 함께하는 자폐스펙트럼 장애 청소년 사회성 기술훈련 프로그램으로, 2011년 서울대학교 의정 교수님이 미국 UCLA에서 도입해 한국에 보급한 근거 기반 치료법입니다. 여기서 '근거 기반(Evidence-Based)'이란 무작위 연구를 통해 실제 효과가 통계적으로 입증된 방법론을 의미합니다(출처: 한국정신건강의학회). 단순히 "친구랑 잘 지내야지" 같은 추상적 조언이 아니라, 14회기에 걸쳐 '대화 시작하기 → 공통 관심사 찾기 → 갈등 해결하기'까지 단계별로 구조화된 커리큘럼을 제공합니다.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징은 '부모 조력형(Parent-Assisted)'이라는 점입니다. 보통 그룹 치료는 아이들끼리만 모여서 연습하고 끝나는데, PEERS는 매 회기마다 부모 그룹과 아동 그룹을 따로 운영합니다. 같은 내용을 동시에 배운 뒤, 집에 돌아가서 부모가 코치 역할을 맡아 아이가 학교나 일상에서 배운 기술을 실제로 써보도록 격려하고 피드백합니다. 저도 수업 후 부모님께 "오늘 ○○가 친구한테 먼저 질문했어요. 집에서도 한 번 더 칭찬해주세요"라고 전달하면, 다음 주에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곤 합니다. 치료실 안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생활 전체로 확장되는 것, 이게 바로 PEERS가 다른 사회성 훈련과 차별화되는 핵심입니다.
또한 PEERS는 '체험학습적(Experiential)' 접근을 취합니다. 이론 설명만 듣고 끝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역할극을 해보고, 다음 주에 과제를 수행한 뒤 그룹 안에서 토론하며 이해를 깊게 만듭니다. 제가 원예치료 현장에서도 이 원칙을 적용해봤는데, "너 무슨 꽃 좋아하니?"라고 물어보는 연습을 화분 앞에서 직접 시켜보니 아이들이 훨씬 빨리 익혔습니다. 말로만 "친구한테 관심 보여"라고 하는 것과, 실제 상황에서 한 번 해보는 것은 체감 효과가 완전히 다릅니다.
친구와 우정의 개념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자폐스펙트럼 아동들이 가장 헷갈려하는 부분이 바로 '반 아이(classmate)'와 '친구(friend)', 그리고 '베스트 프렌드(best friend)'의 구분입니다. 저희 수업에 오는 한 초등학생은 "○○가 나를 괴롭혀서 속상해요"라고 말하길래 자세히 들어봤더니, 그 아이는 그냥 같은 반 아이였고 한 번도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개념 정의가 명확하지 않으면 아이는 계속 혼란스러워합니다.
PEERS에서는 우정 발달을 3단계로 나눕니다. 첫 번째는 '모르는 사람을 알아가는 단계'입니다. 학기 초 새로 만난 친구와 이름을 물어보고 간단한 정보를 교환하는 수준이죠. 두 번째는 '같이 노는 단계'입니다. 공통 관심사를 찾아 함께 시간을 보내기 시작하는 거예요. 세 번째는 '갈등을 해소하며 깊어지는 단계'입니다. 싸우기도 하지만 화해하면서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진짜 친구가 되는 과정입니다. 이 단계별 구분을 아이 머릿속에 심어주면, "지금 나는 이 친구랑 어느 단계인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수업 때 이렇게 설명합니다. "멋진 친구가 좋은 친구가 아니라, 너랑 잘 맞는 친구가 좋은 친구야." 학급 회장이나 인기 많은 아이에게 무조건 다가갔다가 거절당하고 상처받는 경우가 정말 많거든요. 그럴 때마다 저는 "그 친구는 지금 다른 친구들이랑 놀고 있으니까, 너랑 좋아하는 게 비슷한 친구를 찾아보자"고 안내합니다. 실제로 한 아이는 자기처럼 라틴어 식물 학명에 관심 있는 친구를 우연히 만나서, 이제는 쉬는 시간마다 도감을 함께 보며 놀고 있습니다. 공통 관심사, 이게 우정의 씨앗입니다.
대화 기술을 구체적 절차로 가르치는 방법
사회성을 '영어 문법'처럼 가르칠 수 있다는 게 PEERS의 핵심 철학입니다. 영어를 배울 때 문법 규칙을 익히듯, 대화에도 명확한 원칙과 절차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공통 관심사 찾기' 대화법은 다음과 같은 3단계로 구성됩니다.
1단계, 원칙 제시: "친구를 사귀려면 대화를 통해 정보를 교환해야 하고, 그 목적은 공통 관심사를 찾기 위해서다."
2단계, 근거 설명: "진심으로 좋아하는 걸 얘기하면 신나고, 내가 아는 게 많아서 말하기도 쉬워진다."
3단계, 구체적 절차:
- 상대방에게 먼저 질문하기 ("너 뭐 하고 노는 걸 좋아하니?")
- 스스로도 대답하기 ("나도 유튜브 좋아해!")
- 공통점 찾기 위한 질문 ("유튜브에서 주로 뭘 보는데?")
- 상대방 반응 살피기 (눈 맞춤, 맞장구 등)
제가 수업 중에 이 절차를 실제로 적용해본 적이 있습니다. 한 아이가 다른 친구에게 "너 무슨 꽃 좋아하니?"라고 물었고, 상대가 "장미"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첫 아이가 "나도 장미 좋아하는데, 무슨 색깔 장미가 제일 좋아?"라고 자연스럽게 이어갔습니다. 이게 바로 '주고받는 대화(Reciprocal Conversation)'입니다. 질문만 계속하거나, 내 얘기만 하면 대화가 아니라 일방통행이 되는 거죠.
여기서 주의할 점은 '너무 개인적인 질문(Private Question)'은 초반에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PEERS에서는 "몸무게, 용돈, 성적 같은 숫자와 관련된 건 첫 만남에서 묻지 말라"고 명확히 가르칩니다. 한 부모님이 "우리 애가 첫날부터 친구한테 '너네 집 월세 얼마야?'라고 물어봐서 난감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런 실수를 방지하려면 규칙을 명시적으로 알려줘야 합니다. 저는 수업 전에 "오늘은 좋아하는 식물 이야기만 하자. 집 주소나 부모님 직업은 물어보지 않기"라고 미리 공지합니다.
놀림과 괴롭힘 구분하고 대처하는 법
자폐스펙트럼 아동이 사회성에서 어려움을 겪는 또 다른 이유는 '의도 파악'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선의로 해준 말인지, 나를 놀리려는 건지 구분이 안 되는 거죠. PEERS에서는 사회적 거부 상황을 4가지로 분류합니다: 놀림(Teasing), 괴롭힘(Bullying), 당황스러운 피드백(Embarrassing Feedback), 나쁜 평판(Bad Reputation). 이 네 가지를 2×2 매트릭스로 정리하는데, x축은 '내 잘못 정도', y축은 '상대의 의도(선의/악의)'입니다.
예를 들어 '당황스러운 피드백'은 이런 겁니다. 바지 지퍼가 열렸는데 옆 친구가 조용히 "야, 지퍼 열렸어"라고 알려주는 거죠. 당황스럽지만 상대는 나를 도우려는 선의입니다. 반면 '놀림'은 같은 상황에서 "야, 남대문 열렸네!"라고 크게 외치며 웃는 겁니다. 악의는 있지만 신체적 폭력은 아닙니다. '괴롭힘'은 신체 폭력, 심한 욕설, 협박 등이 동반된 경우입니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대처법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괴롭힘에는 절대 혼자 맞서면 안 됩니다. 즉시 부모나 교사에게 알려야 합니다. 하지만 놀림에는 '놀림 무력화(Teasing Neutralization)' 기법을 씁니다. 1단계, 당황스럽지만 침착함 유지. 2단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행동. 3단계, 간단한 멘트로 넘기기("어, 그래.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왜 이렇게 해야 할까요? 아이들이 놀리는 이유는 상대의 반응이 재밌기 때문입니다. 화를 내거나 울면 그 반응이 재밌어서 계속 놀립니다. 그래서 반응을 최소화해 '재미없게' 만드는 게 핵심입니다.
저는 수업 중에 예능 프로그램 클립을 보여주며 "이 사람은 지금 진짜 웃는 거야, 비웃는 거야, 예의상 웃어주는 거야?" 맞추기 게임을 합니다. 처음엔 다들 헷갈려하지만, 몇 번 반복하니 "저 사람은 눈이 안 웃고 있어요. 비웃는 거예요"라고 정확히 짚어냅니다. 상대 반응을 읽는 연습, 이게 쌓이면 실제 상황에서도 적용할 수 있게 됩니다.
특수교육 현장에서 10년 가까이 일하면서 느낀 건, 사회성은 '노력해서 배울 수 있는 기술'이라는 점입니다. 자폐스펙트럼 아동에게 필요한 건 막연한 "친구랑 잘 지내야지"가 아니라, "이럴 땐 이렇게 말해봐" 같은 구체적 절차입니다. PEERS 프로그램이 효과적인 이유도 바로 이 명확함 때문입니다. 단, 이 모든 훈련이 효과를 보려면 부모님과 교사가 먼저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비행기에서 산소마스크를 아이보다 자신에게 먼저 씌우듯, 어른이 안정되어야 아이도 안정됩니다. 제 수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은 "굿뉴스부터 전하기"입니다. "오늘 이 부분 정말 잘했어"라고 먼저 인정해주면, 아이도 "다음엔 저 부분을 더 잘해볼까?" 하고 스스로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사회성 교육의 출발점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 그리고 인내입니다.